역사 속에서 빨간색은 자주 정치적 의미로 쓰였다. 특히 프랑스혁명은 빨간색의 의미가 완전히 바뀐 분기점이었다. 혁명 전 유럽에서 빨간색은 권력의 색이었다. 추기경들은 빨간 로브를 입었고, 왕들은 빨간 예복을 걸쳤다. 하지만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 상황이 역전됐다. 혁명가들은 '자유의 빨간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섰다. 이 모자는 고대 로마에서 해방된 노예들이 쓰던 것과 비슷했다. 그들에게 빨간색은 자유과 해방의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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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 RED 1편 - 석양의 붉은빛, 파장이 만들어낸 자연의 신비권력의 상징, 희소성이 만든 가치
빨간색이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은 그 희소성에서 비롯됐다. 중세 시대에 선명한 빨간색 염료를 만드는 것은 극도로 비싸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가장 귀한 빨간색 염료 중 하나인 '커미스(kermes)'는 지중해 연안의 특정 참나무에 서식하는 작은 곤충에서 추출했다. 이 염료를 얻기 위해서는 곤충을 채집하고 건조한 뒤 가공하는 정교한 과정이 필요했다. 또 다른 고급 적색 염료인 '카민(carmine)'은 코치닐이라는 작은 벌레에서 추출했는데, 이 염료를 얻기 위해서는 수만 마리의 곤충이 필요했다. 이렇게 만든 빨간색 직물은 엄청난 가치를 지녔고, 주로 왕족, 귀족, 고위 성직자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유럽 왕실에서도 빨간색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프랑스 왕실은 빨간 뒤꿈치 신발을 상류층 남성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특별한 허가 없이 붉은 뒤꿈치 신발을 신는 것이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도 왕실 문장에 사용된 빨간색은 왕권의 권위를 나타냈다. 붉은 벨벳, 붉은 융단, 붉은 왕실 인장은 모두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왕권의 색에서 혁명의 색으로
혁명군이 파리에 입성할 때 들고 온 빨간 깃발은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사실 빨간 깃발은 처음에는 역설적이게도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1789년 이전 프랑스에서는 폭동이 발생했을 때, 당국이 빨간 깃발을 들고 군중에게 해산을 명령하는 '계엄령'의 상징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1791년 파리 샹 드 마르(Champ de Mars) 학살 이후, 혁명가들은 이 빨간 깃발을 희생자들의 피를 상징하는 저항의 상징으로 전유했다.
이후 빨간색은 노동운동, 사회주의와 연결됐다. 소련, 중국,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국기에 빨간색이 들어간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 색깔이 왕권의 색에서 혁명의 색으로 바뀐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의 상징이 된 붉은 깃발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에서도 빨간 깃발은 중요한 상징이었다. 특히 파리 코뮌(1871)은 빨간색과 사회주의 운동의 연결을 더욱 공고히 했다. 코뮌 투사들은 빨간 스카프를 둘러 매고 '인터내셔널'이라는 혁명가를 부르며 빨간 깃발을 흔들었다. 비록 코뮌은 72일 만에 무너졌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국제 노동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출판된 1848년 이후, 빨간색은 더욱 명확하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색으로 자리 잡았다. '붉은 군대', '붉은 깃발', '붉은 광장'과 같은 표현들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식 언어가 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는 붉은 깃발을 들고 겨울 궁전을 점령했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는 단순한 빨간색 바탕에 망치와 낫을 더한 디자인이 됐다.
중국의 빨간색, 문화와 정치의 교차점
중국에서는 빨간색이 다층적 의미를 갖게 됐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빨간색이 행운과 번영, 축하를 상징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결혼식과 춘절(설날) 같은 경사스러운 행사에서 주요 색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여기에 혁명과 사회주의의 의미를 추가로 부여했다. 마오의 '붉은 책'(마오어록)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모든 중국인의 필수품이 됐고, "동방은 붉다"라는 노래는 사실상 중국의 비공식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빨간색이 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상징이 중첩된 독특한 색채가 됐다.
현대 정치에서의 빨간색
현대 정치에서 빨간색의 사용은 지역과 맥락에 따라 다양하다. 미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빨간색이 보수적인 공화당의 색으로, 파란색이 진보적인 민주당의 색으로 인식된다. 이는 2000년 대선 당시 주요 TV 방송사들이 선거 결과 그래픽에서 색상 코딩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관습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여전히 빨간색이 좌파 정당의 색으로 널리 사용된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도 색상은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보수 성향의 정당이 주로 빨간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진보 성향의 정당은 파란색을 주요 상징색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색상 구분과 유사하지만, 유럽의 전통적인 정치 색상 체계와는 반대되는 특징이다.
한국 정치에서의 전략적 색상 변화
이러한 색상 선택은 정당의 역사 속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보수 계열 정당은 한나라당 시절에는 주로 파란색을 사용했다. 하지만 2012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붉은색 계열로 전환했고 이것이 이후 보수 정당들에게 이어져 빨간색으로 굳어졌다. 진보 계열 정당들은 더 다양한 색상 변화를 겪었다. 열린 우리당(2003-2007)은 노란색을 주로 사용했으며, 그 이전의 민주당 계열은 다양한 색상을 사용했다. 2011년 출범한 민주통합당이 2013년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당 상징색에 청색(태극 파랑)을 채택했고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을 거쳐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며 파란색을 지속적으로 활용해 왔다.
이러한 색상 선택은 단순한 이념적 상징을 넘어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결정이었다. 보수 성향의 정당은 활력과 열정을 상징하는 빨간색을 통해 역동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했으며, 진보 성향의 정당은 희망과 변화, 신뢰를 상징하는 파란색을 통해 미래지향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다.
빨간색이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의 변천사는 색채의 영향력이 시각을 넘어 문화와 권력의 영역까지 확장됨을 보여준다. 한때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붉은색이 그들에 대항하는 반란과 혁명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과정은 역설적이다. 이러한 의미 전환은 상징이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전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오늘날에도 빨간색은 지역과 문화에 따라 상반된 메시지를 전달하며, 이는 색채가 가진 사회적 언어로서의 유연성과 역동성을 증명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색의 의미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사회와 문화의 진화 과정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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