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R THEORY 04: 색상 체계와 분류 방법 - 먼셀, 팬톤, CIE 색 공간 총정리

대형 페인트 대리점에 가본 적 있는가? 수천 가지 색상 견본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관을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다양한 톤의 회색과 흰색만 해도 백 가지가 훌쩍 넘는다. 도대체 이 수많은 색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찾아낼 수 있을까? 인류가 색을 체계화하려고 노력한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 흥미롭다. 오늘은 무질서해 보이는 색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다양한 시도들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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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THEORY 1편 - 색의 원리와 빛의 관계 - 색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다양한 색상의 정사각형 타일이 그리드 형태로 배열된 이미지. 빨강, 파랑, 노랑, 녹색, 보라 등 여러 색상과 명도를 가진 타일들이 무작위로 배치되어 있어 색상 분류 체계의 필요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둥근 지도 위의 색 여행, 색상환

색상환은 아마 가장 많이 본 색채 도구일 것이다. 무지개 색을 둥글게 이어 붙인 원형 차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술 시간에 손에 들고 색 조합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원 안에서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가 끝없이 이어진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이 간단한 도구 속에 색의 비밀이 숨어있다. 최초의 색상환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중력을 발견한 그 과학자, 바로 아이작 뉴턴이다. 1666년, 그는 프리즘으로 백색광(햇빛)을 분해하는 유명한 실험을 했다. 처음에는 일렬로 늘어선 무지개 스펙트럼이 나왔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뉴턴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 일직선의 스펙트럼을 구부려서 원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는 이 스펙트럼의 양 끝에 있는 빨강과 보라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마젠타(자주색)가 된다는 걸 발견했다. 이렇게 원이 완성되면서 최초의 색상환이 탄생했다. 지금 우리가 교육에서 사용하는 12색 색상환은 사실 뉴턴의 원래 색상환과는 조금 다르다. 현재 미술 시간에 배우는 체계적인 색상환은 20세기 초 독일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에서 가르쳤던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1888-1967)이 개발한 것이다. 이텐은 뉴턴의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하되, 미술 교육에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빨강-노랑-파랑을 1차색으로, 주황-초록-보라를 2차색으로 하는 12색 체계를 완성했다. 뉴턴이 색의 과학적 원리를 발견했다면, 이텐은 그것을 예술 교육의 도구로 발전시킨 셈이다.

요하네스 이텐의 12색 색상환 다이어그램. 중심에 빨강, 노랑, 파랑의 1차색이 정삼각형으로 배치되고, 그 주위에 주황, 초록, 보라의 2차색이 정육각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가장 바깥쪽에는 12개의 3차색이 원형으로 배치된 체계적인 색채 이론 다이어그램.

요하네스 이텐의 12색 색상환(1961년). 중심의 정삼각형에 1차색(빨강, 노랑, 파랑), 그 바깥쪽 정육각형에는 1차색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2차색(주황, 초록, 보라), 가장 바깥쪽 원에는 1차색과 2차색이 다시 혼합된 3차색들이 배열되어 전체 12색 체계를 완성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미술 교육에서 사용되는 기본 색상환의 원형이다. Credit: Originally by MalteAhrens, vectorization by SidShaka,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색상환의 진짜 매력은 색들 간의 관계를 한눈에 보여준다는 점이다.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색들은 '보색 관계'라고 부른다. 빨강과 청록색, 파랑과 주황색처럼 서로 정반대에 있는 색들이다. 이 보색끼리 섞으면 서로의 색을 중화시켜 무채색에 가까워진다. 반면 색상환에서 서로 옆에 있는 색들은 '유사색 관계'로, 함께 쓰면 조화로운 느낌을 준다. 더 재미있는 건 색상환 위에 도형을 그리면 조화로운 색 조합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삼각형을 그리면 세 꼭짓점에 해당하는 색들이 '3색 조화'를 이루고, 정사각형을 그리면 '4색 조화'가 된다. 이런 조합은 대부분 눈에 잘 어울린다. 패션 디자이너나 인테리어 전문가들이 색상환을 항상 가까이 두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색상환에도 한계가 있다. 색상환은 '색상(Hue)'이라는 특성만 보여줄 뿐, 색의 밝기를 나타내는 '명도'나 색의 선명함을 나타내는 '채도'는 표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초록색 하나를 생각해 보자. 밝은 초록, 어두운 초록, 선명한 초록, 탁한 초록... 이 모든 초록들은 색상환에서는 한 점으로만 표시된다. 실제 색 작업을 할 때는 이런 한계 때문에 여러 층의 색상환을 겹쳐놓은 것 같은 3차원 모델이 필요하다. 마치 지구본처럼 색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스템인데, 이것이 바로 다음에 소개할 먼셀 시스템이다. 먼셀은 색상, 명도, 채도를 모두 고려한 더 완벽한 색 지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색의 3차원 지도, 먼셀 색 체계

색상환이 평면 지도라면, 먼셀 색 체계는 색의 3차원 지구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미국의 화가이자 미술 교육자 앨버트 H. 먼셀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평면이 아니듯, 색의 세계도 평면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혁신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먼셀은 색에는 세 가지 기본 특성이 있다고 봤다. 색상(Hue), 명도(Value), 채도(Chroma). 그래서 이 세 가지를 3차원 공간에 배치했다. 마치 지도에서 위도, 경도, 고도로 위치를 정확히 찾듯이, 색도 세 가지 좌표로 정확히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먼셀 색채 체계의 3차원 색 입체 모델. 원통형 구조로 색상, 명도, 채도를 동시에 표현하며, 중심의 무채색축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채도가 높아지고 위아래로 명도가 변화하는 과학적 색채 분류 시스템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먼셀 색채 체계의 3차원 색 입체 모델(1943년 재표기법 기준). 원통형 구조로 색상(Hue), 명도(Value), 채도(Chroma)를 동시에 표현하며, 각 색상별로 최대 채도에 도달하는 명도 레벨이 다름을 보여준다. 평면적인 색상환의 한계를 극복한 과학적 색채 분류 시스템이다. Credit: SharkD,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중앙에 세로로 서 있는 막대기가 있다. 이 막대기는 아래쪽은 검정, 위쪽은 흰색이고, 중간은 회색으로 점점 변한다. 이것이 바로 '명도 축'이다. 검정(0)부터 흰색(10)까지, 색의 밝기를 나타낸다. 이 명도 축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색상이다. 마치 나침반의 방향처럼, 북쪽으로 빨강, 동쪽으로 노랑, 남쪽으로 초록, 서쪽으로 파랑... 이런 식으로 색상이 원형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나갈수록 채도가 높아진다. 중심부는 회색이나 무채색이고, 바깥으로 갈수록 점점 선명해진다. 빨간색을 예로 들면, 중앙의 회색에서 조금 바깥으로 나가면 탁한 분홍색이 나오고, 더 바깥으로 나가면 점점 선명한 빨강이 된다. 먼셀 시스템의 가장 놀라운 점은 단순히 물리적 수치가 아니라 인간의 눈이 실제로 인식하는 대로 색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란색에서 노란초록으로 변할 때 느껴지는 변화량과, 파란색에서 파란보라로 변할 때 느껴지는 변화량이 심리적으로 동일하게 느껴지도록 세심하게 조정했다. 이 시스템에서 색상은 10가지 기본 그룹으로 나뉜다.

R: Red YR: Yellow-Red Y: Yellow GY: Green-Yellow G: Green BG: Blue-Green B: Blue PB: Purple-Blue P: Purple RP: Red-Purple

이 10가지 색상은 각각 다시 10단계로 세분화된다. 예를 들어 빨강(R)은 1R부터 10R까지 있는데, 이중 5R이 가장 순수한 빨강이고, 1R은 자주색에 가까운 빨강, 10R은 주황에 가까운 빨강이다.

먼셀 색채 체계 종합 다이어그램. 상단에 10개 주요 색상이 원형 배열된 색상환과 각 색상의 세부 분할이 표시되어 있고, 하단에 색상-명도-채도를 3차원으로 표현하는 색 공간 모델이 있다. 5R 색상을 예시로 채도 1-14와 명도 0-10의 변화를 보여주며, 중심축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채도가 높아지고 수직으로 명도가 변화하는 먼셀 시스템의 구조를 설명하는 교육용 컬러 차트.

상단: 먼셀 색채 체계의 종합 다이어그램. 10개 주요 색상 패밀리가 원형으로 배열된 색상환은 각 색상이 2.5 단위로 세분화되어 총 100개의 색상으로 구분된다. 하단: 색상(Hue), 명도(Value), 채도(Chroma)를 동시에 표현하는 3차원 색 공간 모델. 3차원 모델에서는 5R 색상을 예시로 채도 1부터 14까지의 변화와 명도 0부터 10까지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먼셀 색채 체계가 단순한 평면 색상환을 넘어서는 과학적 색채 분류 시스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색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먼셀은 '색상 명도/채도'의 형식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5R 5/10'라는 표기는 "순수한 빨강(5R) 계열의 색상 중에서 명도가 5이고 채도가 8인 색"이라는 뜻이다. 이 표기법으로 수천 개의 색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모든 색상이 동일한 최대 채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란색은 채도가 최대 12~14 정도지만, 보라나 파란색은 최대 채도가 16~18까지 간다. 게다가 색상별로 최대 채도를 나타내는 명도도 다르다. 노란색은 명도 8~9에서, 파란색은 명도 4~5에서 가장 선명하다. 이런 불규칙한 특성 때문에 먼셀 색 체계를 3차원으로 표현하면 완벽한 구체가 아닌 독특한 형태의 입체가 된다. 오늘날 먼셀 색 체계는 토양 분류, 식품 색상 평가, 치과 보철물의 색 매칭 등 정밀한 색 구분이 필요한 과학 분야에서 여전히 표준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페인트 가게에서 보는 색상표나 팬톤 색상표도 먼셀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았다. 먼셀이 100년도 더 전에 만든 이 시스템은 색을 과학적으로 분류하면서도, 실제 사람의 시각 경험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디지털 색 체계가 발달한 지금도 그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효하고 영향력 있다.

수학으로 정의한 색, CIE 색 공간

먼셀이 색을 "느낌"으로 체계화했다면, 1931년 국제조명위원회(CIE)는 색을 "숫자"로 정의하려 했다. 주관적인 색 경험을 객관적인 물리량으로 바꾸려는 혁명적인 시도였다. 우리 눈에는 세 종류의 원추세포(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있다. 각각 빨강, 초록, 파랑 계열의 빛에 반응한다. CIE는 이 세포들이 다양한 파장의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을 통해 정밀하게 측정했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수학적 공식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모든 색을 X, Y, Z라는 세 가지 숫자의 조합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X는 대략 빨강 반응, Y는 밝기와 초록 반응, Z는 파랑 반응에 해당한다. 이 삼차원 좌표로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색을 수치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삼차원 공간을 2차원으로 압축한 것이 CIE 색도도(chromaticity diagram)다. 마치 말발굽 형태로 생긴 이 도표는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색상을 한눈에 보여준다. 도표의 둘레는 스펙트럼의 순수한 색(무지개 색)을, 중심부는 흰색을 나타낸다.

CIE 1931 색도도. x축과 y축으로 구성된 좌표계에서 말굽 모양의 곡선으로 가시광선 스펙트럼을 표현하고 있으며, 380nm부터 700nm까지의 파장이 표시되어 있다.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색상을 수학적으로 정의한 국제표준 색 공간 다이어그램.

CIE 1931 색도도(chromaticity diagram).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색상을 x, y 좌표로 정의한 국제표준 색 공간으로, 380nm부터 700nm까지의 가시광선 스펙트럼이 말굽 모양의 경계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대 디스플레이와 색채 기술의 기준이 되는 과학적 색상 분류 시스템이다. Credit: Sakurambo,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제 색을 정확한 좌표로 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특정 붉은색 레이저 포인터의 색을 "CIE 좌표 x=0.64, y=0.33"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지도에서 "북위 37도, 동경 127도에 서울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정확하다. 이러한 정밀한 색 정의 덕분에 산업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TV나 컴퓨터 모니터를 만드는 회사들은 이제 정확히 같은 색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 빨강"과 "소니 빨강"이 같은 빨강이 되도록 표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CIE XYZ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 수학적으로는 완벽했지만, 인간의 실제 색 인식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XYZ 공간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두 쌍의 색을 비교할 때, 한 쌍은 거의 같게 보이는데 다른 쌍은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즉, 숫자상의 차이와 우리가 느끼는 시각적 차이가 일치하지 않았다. 마치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서울에서 울릉도까지의 거리가 비슷하더라도, 한 곳은 고속도로로 쉽게 갈 수 있지만 다른 곳은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완전히 다른 것과 유사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CIE는 새로운 색 공간들을 개발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L*a*b*(랩 색공간)와 L*u*v*(럽 색공간)이다. 여기서 L*은 밝기(Lightness)를 나타내고, a*와 b*(또는 u*와 v*)는 색상의 두 가지 축을 나타낸다. a*는 빨강-초록 축, b*는 노랑-파랑 축이다. 이 새로운 체계들은 수학적으로 CIE XYZ를 변환한 것이지만, 인간의 색 지각과 더 잘 맞도록 설계되었다. 랩 색공간에서 두 색 사이의 거리는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시각적 차이와 거의 일치한다. 이 덕분에 디자인 프로그램이나 인쇄 산업에서는 주로 랩 색공간을 사용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들, 스마트폰부터 DSLR 카메라까지 모두 CIE의 연구에 기반한 색 시스템을 사용한다. 수학과 과학이 예술과 융합된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산업계의 공용어, 팬톤 매칭 시스템

과학자들이 색을 수학 공식으로 정의하는 동안, 실무에서는 훨씬 직접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디자이너가 "이 파란색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인쇄소에서 정확히 같은 색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963년, 미국의 인쇄업자 로렌스 허버트는 매우 실용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는 수백 가지 색상의 잉크를 정확하게 배합하고, 각각의 색에 고유 번호를 붙인 색상 견본집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팬톤 매칭 시스템(Pantone Matching System, PMS)의 시작이었다.

팬톤(PANTONE) 컬러 가이드 북의 펼쳐진 모습. 다양한 색상의 컬러 칩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으며, 각 색상마다 고유한 팬톤 번호와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Yellow U, Yellow 012 U, Orange 021 U, Warm Red U 등의 색상 코드가 보이는 표준 색상 참조 시스템으로, 인쇄 및 디자인 업계에서 정확한 색상 소통을 위해 사용되는 국제 표준 컬러 매칭 도구

팬톤 시스템의 아름다움은 그 단순함에 있다. 복잡한 수치나 공식을 외울 필요 없이, 색상 견본집에서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고 그 번호만 알려주면 된다. 예를 들어 "팬톤 186C로 인쇄해 주세요"라고 하면,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똑같은 밝은 빨간색이 나온다. 여기서 'C'는 코팅된(Coated) 종이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잉크라도 종이 종류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광택 있는 코팅 종이에서는 색이 더 선명하고 짙게 보이고, 코팅되지 않은 종이에서는 더 부드럽고 흡수된 듯 보인다. 이 때문에 팬톤은 'U'(Uncoated, 코팅되지 않은 종이용) 버전의 색상표도 따로 제공한다. 팬톤의 혁신적인 점은 색을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렀다는 것이다. "밝은 빨강"이라고 말하면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팬톤 186C"는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색을 의미한다. 마치 우편번호처럼, 색상에도 정확한 주소가 생긴 셈이다. 팬톤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문화적 영향력을 키운 점이다. 1999년부터 팬톤은 매년 '올해의 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2020년의 '클래식 블루'나 2021년의 '얼티메이트 그레이와 일루미네이팅(노란색)' 같은 선정 색상은 그 해의 패션, 인테리어, 제품 디자인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팬톤의 색상 예측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문화 현상이 됐다. 본래 팬톤 시스템은 '별색' 인쇄를 위해 개발되었다. 별색이란 미리 정확히 배합된 단일 잉크를 말하는데, 일반적인 4도 인쇄(CMYK: 시안, 마젠타, 노랑, 검정 잉크의 조합)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색상들이 많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인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다: CMYK 방식과 별색 방식이다. CMYK는 네 가지 기본 색상 잉크(시안, 마젠타, 노랑, 검정)를 점으로 찍어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돋보기로 컬러 잡지를 들여다보면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별색은 미리 정확히 배합된 하나의 잉크를 사용한다. CMYK로 인쇄하면 대부분의 색을 표현할 수 있지만, 형광색, 메탈릭 색상, 그리고 특정 브랜드의 고유 색상 등은 정확히 재현하기 어렵다. 코카콜라의 빨간색이나 티파니의 청록색 같은 브랜드 고유의 색을 정확히 재현하려면 별색 인쇄가 필요했다. 이런 색들은 CMYK로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동일한 색상을 얻기는 어렵다. 그래서 중요한 브랜드 로고나 패키지는 주로 "CMYK + 별색" 방식으로 인쇄한다. 일반적인 내용은 CMYK로, 특별히 정확해야 하는 색상은 별색을 추가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팬톤도 함께 진화했다. 전통적인 인쇄용 색상표 외에도, 컴퓨터 화면용 RGB 색상값, 일반 인쇄용 CMYK 수치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플라스틱, 섬유, 금속 등 다양한 소재에 맞는 색상 시스템까지 개발했다. 이렇게 팬톤은 종이를 넘어 거의 모든 산업 분야의 색상 표준이 되었다. 오늘날 디자이너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에서 "팬톤 색상"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팬톤이 디지털 세계까지 자신들의 색상 체계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제품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팬톤 번호를 통해 정확히 같은 색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팬톤은 복잡한 색채 이론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학적 정밀함과 일상적 편리함을 모두 갖춘 팬톤 시스템은, 현대 디자인과 제조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색의 공용어가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색 체계 통합

현대에는 이 모든 색 체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포토샵을 열면 RGB, CMYK, Lab, HSB 등 다양한 색상 모드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각각의 장점을 살려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웹 디자인에는 RGB와 16진수 코드(#FF0000 같은)를 쓰고, 인쇄물에는 CMYK나 팬톤을 쓴다. 과학적 색상 분석에는 CIE Lab을, 미술 교육에는 먼셀 시스템을 활용한다. 이들 사이의 변환은 컴퓨터가 자동으로 계산해 준다. 최근에는 인공지능까지 가세했다. 이미지에서 색상을 추출해 팔레트를 만들거나, 자연스러운 색 이름을 자동 생성하는 기술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혁신도 기존 색 체계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질서 속의 자유

색 체계를 공부하다 보면 딱딱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체계가 있기에 우리는 더 자유롭게 색을 다룰 수 있다. 마치 음악에서 음계와 화성 이론을 알면 더 창의적인 작곡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체계들은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 도구일 뿐이다. 빠른 스케치에는 간단한 색상환이, 정밀한 제품 생산에는 팬톤이나 먼셀이, 디지털 색 보정에는 CIE Lab이 더 유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는 도구를 선택하는 지혜다. 앞으로 증강현실(AR)이나 자유 공간 광 디스플레이 같은 새로운 매체가 보편화되면 또 다른 색 체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한해 보이는 색의 세계에 체계적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통해 더 자유로운 창작과 정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색 체계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다.

COLOR THEORY 5편 - 색채 조화와 대비 이론 - 보색, 동시대비, 계시대비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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